제1장. 서론
레오폴트 폰 랑케, 그는 독일의 역사학자이며 사료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역사가의 객관적인 서술을 강조하였으며 근대 사학을 확립하여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. 그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맞게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랑
역사학과 인류학에서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. 80년대 초 ‘뿌리깊은 나무’는 종래의 역사학에서 배제됐던 민중들의 구술생애사를 처음으로 출간했으나, 이것은 저널리스트들이 역사학 밖에서 구술채록을 시도한 것이었다.
이 민중자서전은 다양한 민중들의 삶을 채록했
랑케의 역사학 이론을 이야기 하면서 꼭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. 바로 19세기 초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을 주도 했던 헤겔이다. 랑케의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시작되었다. 랑케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관념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한계를 경험적 역사학
랑케의 생애
1795년 - 북독일의 튀링겐에서 출생. 그의 집안은 대대로 독실한 루터교 목사 집안
1814년 -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고전을 공부
1818년 ~ 1825년 -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.
1831년 - 정치적 저널 ‘Historish-Politisch Zeitschrift’의 편집자
1880년 - 자신의 저술 활
역사학의 조류
①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학랑케에 의해 근대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으며 역사학을 과학적인 학문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. 그러나 랑케는 ‘과학성’을 실증주의와 연관시켜 정확히 알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설명하려하지 않았다. 그는 공평성과 객관성을 확보
데카르트의 코기토("나는 생각한다, 고로 나는 존재한다")의 개념은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세계관의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. 그럼 역사학에서 중세와 근대를 나눌 수 있는 분기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? 이런 분기점을 찾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중세와 근대를 명확하게 나눈 지점에 대한 이
역사학으로 전환하였다. 부르크하르트는 1839년 가을부터 1843년 봄까지 베를린 대학에 머물렀다. 이곳에서 그의 학문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, 랑케(Leopold von Ranke)와 프란쯔 쿠글러(Franz Kugler)를 만나게 되었다.
당시, 역사학파의 총수 랑케의 사관과 역사적 방법에 대한 강의에서, 그는 큰 감명
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"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,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"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. 즉, 역사가는 자신을 죽이고 과거 그 자체만으로 역사
역사학파들의, 특히 랑케의 역사적 세계관은 위에서 살펴보았던 초기 심미적 역사주의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슐라이어마허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의 개체이론과 그에 상응하는 해석학에서 힘입은 바 크다. 이것은 결국 문헌을 통해서야 비로소 현재에 알려질 수 있는 역사적 삶의 일회성이 아직은 방